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벽제관 전투 (문단 편집) == 전개 == 1월 26일, 명군은 선봉 3천의 기병을 한성으로 보냈으며, 정탐을 통해 명군의 경로를 파악한 일본군은 이튿날 벽제관에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조총 사격과 백병전, 협소한 공간과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길바닥이 진흙탕이 된 악조건이 겹쳐 명군 기병대는 후퇴하고 만다. 이후 명군의 증원군이 합류하면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다시 일본군의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명군을 몰아내는 등의 양상이 반복되었다. 실제 전투에서 일본군은 주로 [[오오타치]]를 휘두르며 근접전 위주로 싸운 것으로 보이는데, [[징비록]]과 주로 이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선조수정실록, 신흠의 상촌집 등에서는 일본군이 '''긴 칼'''을 휘두르며 돌격해왔다고 적었고, 선조실록에서도 무기에 대해 정확히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일본군이 사격했다는 명시적인 기록은 없는 반면 돌격해왔다는 기록은 보인다. 일본군의 장창은 거의 보병 상대 둔기류에 가까운 물건이라 기병전에서는 써먹을 수 없었고, 조총은 재장전속도와 명중률에 한계가 있으니[* 일각에서는 보급 문제로 [[임진강 전투]] 시점부터 일본군이 창칼과 장궁을 중심으로 하는 왜구식 전투로 회귀하다시피 한 게 아니냐는 주장을 펼치는데, 당장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도 모란봉에 배치한 철포대만 2천명에 달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증원군 도착 이전에 명군 기병대를 패퇴시킨 것은 철포대의 사격이었다.][* 사실은 '''애당초 일본군은 조총을 주력으로 쓴 적이 한 번도 없다.''' 일본군의 조총병 비중은 높게 잡아도 20%가 채 안 되며 이는 최소 30% 이상으로 여겨지는 일본 궁사보다도 적은 것이다. 참고로 정유재란 시점의 조선군은 무려 3만 정 이상의 조총을 확보해(이순신이 생산한 정철총통, 명으로부터 공급받은 오스만식 화승총, [[김충선]]이 알려 준 제작기술을 통해 확보한 조총, 노획분 등) '''일본군과 대등하거나 더 많은 조총을 갖고 있었다.'''] 결국 오오타치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다. 1월 27일, 이여송은 조명 연합군 다수의 병력과 포병 등을 놔두고 [[기병]] 1,000여 병력과 호위군만 꾸려 한양으로 직접 향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 급습을 당하여 포로가 될 뻔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큰 피해를 입은 명군은 싸우는 일본군과 합류한 일본군의 수가 상당하다고 생각하고 바로 평양까지 도망갔고 뒤늦게 장수 [[양원|양원(楊元)]]이 화병을 이끌고 도착하자 일본군이 물러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